2009년 11월 22일, 저희 JOINTHELEADERS는 컨퍼런스 참여차 토론토 쉐라톤 호텔에 방문한 영화감독 이민숙씨와 만날수 있었습니다.긴 회의를 마친 후 임에도 불구하고 이민숙씨는 JOINTHELEADERS 인터뷰 팀을 밝은 미소로 반겨주셨습니다. 이미 여러 수상작을 배출한 이민숙씨의 인기는 인터뷰가 진행되었던 호텔 한 모퉁이에서 조차 느껴질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됐던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녀의 작품 ‘Tiger Spirit’의 Gemini 최우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상 수상을 축하하는 여러 지인들을 심심찮게 만날수 있었습니다.

감독님이 어떻게 성장하셨는지, 특히 캐나다 한인 사회가 이민숙씨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 해주세요.
저는 1969년 한국 광주에서 태어나 세살에 캐나다로 이민왔습니다. 1969년 당시, 토론토 한인사회는 크리스티/블루러에 한국 식당 몇 곳과 편의점 정도만 있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지금과 비교해보면 정말 보잘것 없을 정도로 작았었죠. 당시 한인사회 규모가 크지 않아서 교회행사나 단체 소풍등을 통해 서로 만났었고, 교민들 수 자체가 몇 안되었기에 서로 아주 친밀한 관계속에 지냈던 기억이 있어요.
이민자로서의 경험과 부모님의 희생은 저의 작품들의 좋은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저와 제 형제들을 위해 여기 오신 후 겪으신 일들을 되새겨 볼 때면 아직도 가슴이 뭉클 해져요. 아마 두분께서 한국에 계속 계셨었다면 형편은 많이 나았었겠죠. 제 부모님은 40대에 이민을 결정하셨고 늦은 나이 때문에 영어를 전혀 못하셨어요. 어머니께선 제가 열두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께선 현재 80대 이시지만 아직도 영어를 못하십니다. 그 당시 많은 한인분들처럼, 제 부모님께선 편의점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씩,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일하셨어요. 두분 모두 정말 열심히 일하셨지만 저희 가족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어요.
때론 두분이 편의점 카운터 뒤에 수감되어 있으신 것 같을 정도로, 정착한 후 부모님께선 일을 쉴새없이 하셨어요. 두분의 영어실력의 한계 때문에 저의생활은 편의점내로 규정 되었었지요. 어린시절 영어가 어려우신 부모님 위해 자주 통역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를 들자면 정기적으로 걸려오는 캐나다 국세청 직원과의 전화 연결이 있었어요. 영어도 영어지만 부모님들은 많은 인종차별에 맞서야 하셨습니다. 덕분에 전 직접 많은 부당함과 부조리함을 자주 목격했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이런 환경속에 살다보니 저와 제 형제들은 이 사회에서 약자일수 밖에 없는 부모님을 꼭 돌봐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키우며 자랐지요.

비교적 어린시절 낯선 땅을 찾은 많은 이민자분들 같이, 제 자매들과 저는 정체성 위기라는걸 겪게 됩니다. 저희 부모님께선 저희가 성공하길 바라셨어요. 하지만 두 분께 성공이란 저희가 캐나다 문화에 완벽히 하나가 되어 완벽한 캐나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성공이었기에 본래 가지고 있던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당부분 지워버리는 것이었어요. 전 자라면서 많은 부분에 있어 제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어느 면모로 봐도 제 자신을 한국인으로 보지 않았어요. 저와 같은 나이와 시기에 이민 오신 많은 한인분들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 무척 혼란스럽다고 해요. 커가는 동안 책, 잡지, 신문 등 모든 메스 미디어에 비춰진 것들의 사회적 모습들을 반영하며 캐나다 대중문화에 통합되어 가거든요. 그 대중문화 속에서 동양인들은 그 어떤 프로그램이나 매체에 나타나더라도 놀림감이 되었어요.
제 자신이 한국 사람임을 기억할 수 있게 한 한가지는 바로 아버지께서 주신 제 이름입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선 제게 “네 이름은 메리가 아닌 민숙이야. 그 이유는 넌 네가 한국사람인 것을 자랑스러워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걸 아직도 기억합니다.
당시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인종차별이 너무 부정적이어서 전 자라면서 절대로 제 자신을 동양인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상태로 사춘기를 보내고, 키와 머리가 모두 자란20대 초반에, 한국인이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등을 그제서야 제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나이었기 때문에 제 자신의 문화적 정체를 의식적으로 찾기 위해서 재교육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가 봤습니다. 20대 초반, 처음 돌아가본 한국이 제게 준 건 고정관념의 타파였습니다. 실로 큰 경험이었어요. 제가 알고있던 동양인, 특히 한국인에 대한 제 자신만의 해석들이 상당부분 비현실적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고, 특히 한국인 그리고 한국문화의 다양성, 문화적 진실들과 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처음으로 알고 느낄수 있었습니다. 아마 교포분들과 1.5세대 분들에게 한국방문은 본인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줄수있는 필수라고 할 정도로 큰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토론토 시내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어렸지만 그 때도 저에게 토론토는 흥미로운 도시였고 특히 다문화 도시로 서서히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복이었어요. 저는 유색인종의 유입이 토론토 재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그 때 다문화 열풍의 중심은 토론토 이었기에 그 여파로 우리 동양문화의 인식도 서서히 변화되어 갔고, 인식이 변하는 만큼 사회 참여의 길도 열렸습니다. 토론토는 더욱 흥미진진한 곳으로 변해갔고, 전 그 변화의 큰 수혜자들 중 한명 일 것 입니다.
한국문화엔 의사, 변호사, 판사와 같은 전문직업들을 더 높이 평가하는 면이 있어서 몇몇 한인 친구들은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을 몹시 부끄러워 했어요. 한국 문화에선 손을 더럽히거나 땀흘리는 노동직에 종사하는사람은 존경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요. 직업에 대한 계급적 편견은 저를 한인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 같은 일을 하시는 한인분들을 폄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너무 싫어했어요. 생각해보면 현대나 삼성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하루 16시간씩 근무하시는 데, 몸 힘든건 매한가지 아닐까요?

다큐멘터리 영화 프로덕션 산업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잡지는 긴시간 편의점에서 일하는 저에겐 삶의 낙과 같았어요. 정말 지루했었거든요. 매 주 목요일에 새 잡지가 들어오는데, 토요일 즈음 이면 다 읽었어요. TIME부터 Vogue까지 많은 잡지와 매일 오는 신문들을 장르와 주제에 관계없이 모두 읽었죠. 읽을 잡지가 없어진 월,화,수요일의 삶은 마치 메마른 황무지와 같았어요. 심심함을 떠나서 무언가 빠진듯한 3일 이라고 해야 할까요? (웃음) TV시청 또한 빼놓을수 없겠네요. 북미 문화는 저희 부모님께서도 잘 모르셔서 많은 것을 TV로 배워야했어요. 자의와 타의를 구분하기는 어렵겠지만 결과적으로 제 성장기는 여러 대중매체에 큰 영향을 받았어요.
다큐멘터리는 제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만들지 않았어요. 말씀드렸듯이 전 제 자신을 찾기 위해서 한국 여행을 시작해서 말레이시아와 베트남도 둘러 보며 두세 달을 보냈어요. 시작은 거창했지만여행 자체가 치밀하게 계획된것도 확실히 무언가 찾겠다고 간것도 아닌 ‘자유 여행’ 이라고 보는게 맞겠네요. 여행을 마친 후 지역 라디오 방송국CBRN 라디오 뉴스디렉터로 일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메스미디어 산업에 입문하게 되었어요. 방송 주제가 주로 사회적 문제점과 비판, 그리고 사회 운동권의 지지였기 때문에 그 당시 있었던 라디오 방송국에 비해 어찌보면 좀 혁명스런 방송국이 었어요. 주로 다뤘던 주제들의 예를 들자면 도시내 가난문제 라던가 정신과 진료 반대, 환경보호 운동등 이었어요. 일하면서 많은걸 배우겠지만 제 첫 메스미디어 직책이 저에게 깨우쳐 준 것은 정치세력에 항거 하는 목소리들, 여러 정치 단체들의 활동,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상들 이 존제한다는 것이었어요. 그시절엔 한 주에 하루 정도 쉬면 잘쉬었다 할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살았죠. 일주일 내내 일해도 $500밖에 벌지 못했지만 많은 배우들과 인터뷰하고 전 세계의 사건-사고 들을 보도하며 각양 각색의 경험을 할수있게 해준 참 고마운 시간이었어요. 그 후 CKLN (CKLN-Ryerson 대학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이삼 년 정도 일하던 도중 다큐멘터리/기록물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당시 전 학교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었고 시간과 돈도 부족했었는대, 운 좋게 방송국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 한 명에게 텔레비젼 프로듀서 분을 소개 받아서, 스물아홉 나이에 작은 프로덕션 회사에사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프로덕션 회사에서 일 년 정도 일한 후 갖가지 TV프로들의 제작 보조로 일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었죠. 열심히 일하다보니 일하던 TV 프로그램들의 ‘연출’ 또는 ‘감독’ 으로 소개되기도 하더군요. 그러던 어느날, 제 프로듀서는 정식 훈련이나 교육도 없는 초보자인 저에게 프로그램 의 총 감독을 맡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믿을 수 없었죠. 솔직히 말도 안되는 일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이 기회를 살려 저만의 영화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계획 끝에, 캐나다 국립 영화 위원회와 합의하에 첫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제가 다큐 감독이 될수있었던 가장 큰 요인을 하나 꼽으라 하면 아마 운이라고 할꺼에요. 제 성공비결을 말해 본다면, 우선 내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깊게 탐구할수 있는 시간을 가졌었고, 성공을 깊이 갈망했고, 운도 정말 좋았던것 같아요. 상상도 할수 없던 순간에 그저 알고 지내던 친구가 저를 다큐멘터리 산업과 소개시켜준 것과 같이 예상치 못할 순간에 오는 기회는 만들수 없는 것이니까요.
지금까지 다큐멘터리 산업에 종사하시면서 어떠한 도전 또는 난관들이 있었나요?
정말 많은 일들을 예로 들수 있겠네요. 가장 크고 언제나 반복되는 듯한 난관은 제 직책에 대한 모호한 정의가 아닐까 싶어요. 다큐 감독이라고 하면 하는 일이 딱 정의가 될 것이라 생각할 지 모르시겠지만 업계에선 제가 하는 일이 예술 쪽에 속하는지 정통적인 영화감독인지 확실히 정의내리기 쉽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에 따른 선입견들도 많고요.
영화 업계 안에는 여러가지의 직업들이 있지만 직책이 뚜렷하게 정의되어 있진 않습니다. 그러니 안 그래도 모호한 직책들인데 그 위에 영화의 주제에 맞게 각자 역할 분담하긴 쉽지 않아요. 때문에 영화 주제를 모두에게 확실히 각인시킨후 임원들 한사람 마다 어느정도 창의적인 행동이 필요한데, 많은 사람들이 설명서로 배우는 것에 익숙해져서 창의적인 생각을 안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드러난 솔직한 목소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절대로 무엇이 자기자신을 영화계에 들어오게 했는지를 잊으면 안돼요. 저 같은 경우엔, 모두 알고는 있지만 피치못한 사정으로 알리지 못하는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들을 작게 나마 나눌수 있는 대화의 창이 되는 ‘영화’에 매력을 느껴요. 전 매번 영화를 찍을 때마다 이런 진솔한 이야기가 나타날 때를 너무 기다린답니다.
영화는 기회의 산물입니다. 아무도 카메라를 들고있는 사람을 반겨주지 않아요. ‘Tiger Spirit’을 찍기 위해 북한에 입국하기 까지 2년이나 걸렸어요. 입국 후에도 저와 저희 팀은 항상 감시를 당했는데 그 이유는 어찌보면 당연하지요. 카메라라는 작은 도구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수 있는지 북한 당국도 알고 있는것이지요.
제 첫 작품 ‘El Contrato’는 온타리오 주 농민들과 고용제도를 다뤘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난속에 살고 있었어요. 의료 서비스도 부족했고 연금 제도 같은것도 없었죠. 아무런 법적 권리도 취하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어요. 캐나다 사람들은 소위말해 3D 업종 (Dangerous, Dirty, Demeaning – 위험하고 지저분하며 모욕적인 궂은 직업)에 종사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농업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주로 멕시코 사람들이 아무 보호도 없이 기계 취급을 당하며 일을 하고 있던 모습을 볼수 있었죠.
캐나다 국립 영화 위원회가 이 영화를 제작, 출시한 직후 리밍턴시에 거주하는 농장 업주들은 저와 위원회를 제 다큐멘터리를 폐쇄하지 않으면 민사 고소 하겠다며 협박 했었어요. 제 사기는 정말 꺽여졌었죠. 하지만 저희는 그 영화를 결국 출시했고 업주들은 저희를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감독님과 비슷한 직장을 목표로 추구하는 이들에게 조언 한마디 해주십시오.
미디어 프로덕션에 관심있는 캐나다 한인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찌 보면 모호할수도 있는 정체성이 절대 실이 아닌 득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호하다고 하는 자기 자신의 캐나다인-한국인의 정체성은 자신의 사연을 더 복잡하게 만들죠. 덕분에 다수의 대중들에겐 더 흥미롭고 예상할수 없는 이야기들을 줍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대중들이 알고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한국계 캐나다인들은 자기 자신들이 세상에 표현할것이 이미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감 있게 찾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전 제주도의 해녀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제겐 그런 평범하다고 생각 할지 모를 사연 깊은 인생이 정말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많은 젊은 한국인들은 치과의사, 의사, 아님 변호사가 되라는 말을 듣고 자라지만 전 젊은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귀 기울여 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전 이야기꾼들이 문화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그래도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 여러가지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또 그 길을 찾아서 작가의 꿈을 키우고, 영화감독이 되려고 노력하는 하는 캐나다 한인 젊은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걸 몸소 느낍니다. 이 사람들이야 말로 자신의 부모 세대와 아이들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해 주고, 또 알아가게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적 수익은 많지 않다해도 삶의 보람은 커요. 우리 사회엔 아직 이야기꾼들이 적지만 미국 한인사회엔 점점 그 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캐나다 한인들은 아직도 부모세대가 물려준 보수적인 마인드 때문에 발버둥치고 있어요.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알고도 부모세대의 희생을 생각하며 심한 죄책감을 느낍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예술 활동을 중히 여기는 한인 사회 가치관의 성립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극복해야할 것 들이 더 많이 있기때문에 더 힘들수도 있겠고요.
캐나다 한인사회를 예전과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보조 편집자들 중 한 분은 캐나다에 열세 살 때 캐나다에 온 한인이세요. 기술도 탁월하고 한국어와 영어 둘다 능통해서 ‘Tiger Spirit’ 촬영때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 분은 토론토내에 많은 프로덕션 회사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물론 모두 한인회사들은 아니고요.
이렇게 유연성있는 사람은 참 좋아요. 여러분 같은 단체를 좋아하는 이유는 젊은 캐나다 한인들이 다른 캐나다 한인들의 멘토가 되게끔 도전 정신을 심어주기도 하고, 교회를 넘어선, 더 광범위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기 때문이지요. 한인 기업인 협회 만으로는 캐나다 한인으로써 정체성을 확립 시킬만한 무언가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지만, 요즘 추세로 봐선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로서 필요한 특징 한 가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도자란 그 그룹이 당신의 하고자 하는 것을 믿어주고 당신과 일하고 싶어해야 하는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두 가지 특징들이 생각나네요.
첫번째는 다른 사람의 장점들을 인정하는것. 제가 일을 할때는 언제나 외부 인력, 즉, 편집사, 촬영기사, 음향기술가와 함께 일하는데요, 그 분들만이 가지고 계신 강점들을 중요하게 여겨요. 같이 일하는 모든 이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강조하는 것이 현명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감독할 때는 문제에 봉착 했을때 어떻게 해결할지 그때 그때 찾아내가야 하거든요. 제 생각에 감독이란, 소리만 지르고 억지로 일 시키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장점들이 인정되면 자신감이 생겨요. 당신이 표현하지 않을 지라도 믿어 준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면 불안정해지고 실수하기 시작하죠. 저는 항상 제 팀에게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마음가짐과, 건전한 학습의 환경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두번째는 회복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넘어진 후 자기 혼자 다시 일어서는 것은 항상 필요해요. ‘내가 하는 일은 꼭 이루어 진다!’ 라고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루어 질수 있고요.

한국계 캐나다 젊은 리더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난관이나 장애물이라 하면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것들을 극복해야 할까요?
영화, 텔레비전, 즉 메스미디어 산업은 그 안과 밖에서 경쟁이 무척 심합니다. 재정 지원이나 투자가 매년 줄어들고 있죠. 입문하기도 어렵거니와 들어온다 하더라도 먹고 살기 매우 힘든 업계지요. 힘든 시절을 어느 정도 각오 하셔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것도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이 믿고 일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각오 하셔야 합니다. 너무 부정적인 것 같아 마음에 걸리지만, 업계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십년을 다큐멘터리만 만들어온 저도 이제야 처음으로 시트콤/드라마를 찍게 되는걸요. 영화나 TV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면 자기 자신이 무슨 이유로 이 업계에서 일하고 싶은지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목표와 이유가 있어야만 부족한 보수, 계약마다 다른 직업, 허드렛 일이라고 볼수있는 필름수정이나 필사 같은 일들을 견디어 낼 수 있게되요. 가장 어려울 때야 말로 자신의 비전을 잃지 않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 인지를 잊지마세요.
솔직히 요즘 ‘난 영화 제작자가 될꺼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장비가 없기 때문에 영화를 못만들게 되거나 하지나는 않아요. 기술발달 덕분에 개인 영화 제작이 훨씬 쉬워 졌음은 물론이고 누구나 소형 비디오 카메라를 하나 정도는 구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영화 제작에 필요한 많은 작업들을 스스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해서 촬영 연습 같은건 몇 번씩 반복할 수 있어요. 내 스스로 내 목표를 위해 할수 있는것이 있다 라고 생각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많은 기회들을 열어두세요. 가령, 라디오 방송 일을 하고 싶은데 라디오 딱히 그 분야에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다면 온라인을 포함한 다른 미디어 분야에서라도 일해 보세요. 영상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어디서나 있기 마련이기에 온라인 미디어는 요즘 크게 성공했고, 그러므로 일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에요. 인터넷 영상 매체, 휴대폰, 등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당신의 목표를 위해 일하게 될 준비를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또한, 조사를 하세요. 인터넷으로 어느 프로덕션들이 있나, 방송사들은 어떤곳들이 있나, 캐나다 영상 위원회 소속 감독님들은 누가누가 있는지 알아두시면 좋을꺼에요.
한가지 더 묻겠습니다. 감독님께선 사회생활을 비교적 늦게 시작하고20대에 수년동안 방황한 시기가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20대 후반인 많은 캐나다계 한국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이민와서 성장한 사람들은 더 그럴수도 있겠네요. 성인이 되고 대학이나 다른 고등 교육을 받았지만 아직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있는 분들에겐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전 그 분들에게 인생은 살아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집에서 벗어나 여행도 가보고, 보통이라면 해보지 않을 법한 것들을 시도해 보세요. 자신만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세상도 구경하고, 자기반성을 해보세요. 제 모험의 시작은 한국여행 이었어요. 비록 짧은 여행이었지만 전혀 예상 하지 못했던 세계에 눈을 뜨게 했었죠. 전 여러 가지의 경험을 겪어보려 노력했었어요.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만들게 될 것이라곤 예상 못했지만, 한 순간에 분명해졌었고 제 안에 갈망이 있다고 느꼈어요. 세상은 무척이나 흥미롭고 여러분께 성취감을 주는일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걸 그껴 보세요.
가능성있는 성공 희망자들에게 마지막 조언을 해 주세요.
당신의 열정을 끌어내는 일을 하세요. 돈을 벌지 않고도 너무 좋아서 하고싶어지는 열정적으로 하게되는 일을 하세요. 자신만의 행복과 도전을 잊지마세요.

‘Tiger Spirit’ 상영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2008년 Hot Docs와 Reel Asian 영화제에서 개봉했던 작품입니다. 주요 관람객은 캐나다 사람들이었어요. 한국 어르신들을 위해 교회 내에서 (한) 네 번 정도 상영한적이 있었지만 예전 겪으셨던 아픈 추억들을 상기시켜서인지 우울해 하셨어요. 젊은 캐나다 한인들은 모두 흥미롭고 교육적인 작품 이었다고 말씀 해주셨어요. 영/셰퍼드 교차로에 있는 노스욕지역 시의회 의원 John Filion씨는 이 영화 상영 준비에 많은 관심을 표현했습니다.
새로 나올 다큐 영화 계획은요?
M*A*S*H라는 TV프로그램은 많이 알려져있고 인기있지요. 하지만 대부분 그 프로그램의 코메디 적인 요소만 알려져 있어요. 실제로 M*A*S*H는 어땠을까요? 본디 MASH라는 것은 이동식 야전 외과 병원이었고, 미국 군대가 한국전쟁 동안 설립한 군진의학의 혁신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어요. 전투 도중 MASH라는 것은 운전으로 전선에서 30분 내의 거리에 있는 텐트였습니다. MASH들은 전투들의 장소를 따라다녔었어요. 현재 한국에서 MASH 병원들 안에 있었던 의사, 간호사와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모두 미국사람들 이죠. MASH 텐트들 주위에 잡무를 맞으며 근무하셨던 한국 분들을 찾고있지만 아직까진 실패했어요. 지금 만들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History Television 채널에 2010년 방송 될 것 입니다.
새로 나올 시트콤 계획은 무엇입니까?
제가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 같다고 얘기했었죠? ‘Hogtown’에서 보셨듯이, 제가 시청 주위에 2년 정도 맴돈 이유는 지방정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재가 좀 괴짜 기질이 있거든요. 그 관심분야를 기준 삼아 TV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생각은 항상 있었어요. 올해 이런 아이디어를 저희 프로듀서에게 제시해 보았어요. 예순 살 백인 할머니 한분께서 우연히 해밀턴같은 한 도시의 시장이 되는 이야기를 구상해 봤었죠. 이 TV프로그램 이름은 ‘She’s the Mayor’로 정했는데 드라마를 승락한 프로덕션이 타이틀을 지어주었어요. 한 TV방송국에게 소개해서 자금 지원을 받아 3월에 촬영을 시작하게 되었고 줄거리는 아직 진행중입니다.
상당히 흥미진진 한 일이에요. 전 항상 픽션을 시도해 보고 싶었었고 이 게 첫 기회인 셈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모든건 운, 시기, 그리고 인맥 덕이에요. 반시간 씩 열세 방송분, 한 시즌을 맞게 됐어요. 9월에 방송되니 너무 기대되요. Vision Television 채널에서 방송될 예정 입니다.

이민숙씨 프로필
이민숙씨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입니다. 그녀의 영화 ‘Tiger Spirit’은 2009년에 Gemini 최우수 사회/정치 다큐멘터리 상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다큐멘터리 ‘Hogtown: The Politics of Policing’은 2005년 Hot Docs 다큐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 캐나다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단편 docu-poem (다큐멘터리 시)들 ‘Borderlaess’와 ‘Sedition’은 베이루트와 베를린에까지 세계적으로 상영되었습니다. 그녀의 첫 특집작품 ‘El Contrato’는 Gemini상으로 지명되었고 ‘El Contrato’의 이민 노동자 인권 영향으로서 Cesar E. Chavez Black Eagle상을 얻었습니다. 민숙씨의 최근 다큐멘터리 ‘My Toxic Baby’는 2009년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개봉했습니다. 그녀는 2010년에 ‘Badge of Pride’라는 캐나다 동성애자 경찰들의 이야기를 비추는 다큐멘터리를 개봉할 것입니다. 민숙씨의 첫 코믹 드라마 시리즈 ‘She’s the Mayor’는 Vision TV채널에 2010년 개봉될 것입니다.
인터뷰 날짜: 2009년 11월 22일.
인터뷰 진행: 이주석, 신용섭, 윤선아
사진: Gerald Law
편집: 김도윤, 김형빈, 이희범, 안우진, 임현우
위 인터뷰의 개인적인 의견들은 JoinTheLeaders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번역: 김가은, 박헌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