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6일에 신호범 워싱턴 주 상원의원께서 토론토를 방문하셨습니다. 저희 JoinTheLeaders 토론토팀은 한국에서 집 없이 떠 돌던 수많은 길거리 고아들 중 한 명에서 미국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신 그 분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는 한식당에서 진행됐습니다. 신호범 상원의원님께서는 깊은 삶의 굴곡으로 감명 깊은 경험들로 이루어진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한 미군의 양자가 되시기 전과 후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신 상원의원: 많은 역경들의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제 인생에서는 세 가지의 중요한 시험들이 있었습니다: 생존, 교육 그리고 양자와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생존에 관해선, 정상적으로 태어나면 부모님이 계시지만, 저는 아무도 없어서 살아남기 위해 기차역에서 먹을 것을 구걸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살아남기가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나이가 일곱 살 일 때 당시 아홉 살 이였던 한 아이와 친구가 됐습니다. 그 친구도 집 없는 아이였고 이름은 재원이었습니다. 아침이면 각자 헤어져서 먹을 것을 구걸하고 해가 지면 기차역에서 만나 얼어 죽지 않도록 서로 껴안고 잠을 잤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서로의 생존을 의지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호범아(신 상원의원님의 한국 성함), 나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자살하고 싶어.” 그래서 저는, “그러지마, 우린 서로를 위해 같이 살아야 해. 서로 의지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걸을 마치고 기차역으로 돌아왔는데 친구가 안 보여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원이를 찾았을 때 그는 선로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그 밑으로 급히 뛰어 내려갔지만 그의 시체만 발견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한 것입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울었었는지 모릅니다. “너는 네가 내 하나뿐인 친구였는지도 몰랐니”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이 오자 그들은 재원이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들통에 던져 넣어 싣고 갔습니다. 그때 저는 마음속으로 재원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재원아, 넌 겁쟁이야. 우리는 같이 살았어야 했는데 이젠 넌 떠나가고 없네. 난 끝까지 네 몫까지 살아 갈 거야.” 오늘까지도 그를 생각하며 그리워 합니다. 그가 제게 생존 본능을 주었어요 –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살아남을 것이다. 그는 오늘의 제 모습과 제 생존의 의미에 상당히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한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저는 허쉬 초콜릿을 생전 처음으로 맛 보았습니다. 태어나서 그토록 맛있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미군들을 뒤쫓아 다녔습니다. 어느 날 전투군인 중 한 명이 저를 하우스보이로 데려갔습니다. 그렇게 그 집에서 이년 반을 살게 됐습니다. 혼자 있을 때 미군들이 갖고 있는 많은 옷과 풍요로움을 보면서 저는 외로움을 자주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혼자 울고 있을 때 눈을 떠보니 한 군인이 제게 다가와 꼭 안아주시면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난 미국에 아이가 셋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울 때마다 마음이 아프단다. 네가 왜 우는지 알고 싶구나.” 그 분이 제 양아버지가 되셨습니다. 당시 저는 열여섯 살 이었습니다. 제가 열아홉이 되던 해인 1955년,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저의 첫 역경인 “생존” 문제를 극복 할 수 있었습니다.

교육, 검정고시(General Educational Development)와의 투쟁
그 다음의 역경은 교육이었습니다. 미국에 온 후 제 양아버지께서 학교에 다녀보라고 제안을 하셨었지만 저는 한번도 다녀본 적이 없어서 낙담했습니다. 선생님이 되는게 꿈이었지만 저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초등학교 입학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남겨진 하나의 기회는 검정고시를 보는 것뿐이었습니다. 합격하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게 되고 대학입학도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때 저는 ABC 도 몰랐었지만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열네 달 만에 합격했습니다.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이 힘든 줄은 알았지만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이 주는 것을 그저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육은 스스로 노력을 해야만 얻는 것입니다.이 모든 것들은 제게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역경이었습니다. 제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은 제 아버지셨습니다. 제가 힘들어 할 때 항상 제 곁에 계셨었습니다. 때때로 제게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시곤 했어요, “나의 아들아, 난 너를 믿는다.” 그 말은 제가 필요했던 용기를 북돋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분이 없으셨다면 제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지금의 제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가능은 없다, 난 가능하다. (I’m possible, not Impossible.)
혼자 공부하면서 저는“할 수 있다”라는 자세를 갖고 교육과 배움은 자신의 몫이란 것을 깨닫았습니다. 결심만 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오늘까지도 저는 그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은 450페이지인 영어사전 한 권을 다 외워봤습니다. 앞 장에서 외운 단어들을 까먹게 되면 화가 나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장의 단어들을 외운 후 찢어내서 태우고 물컵에 타서 마셨습니다. 배우는데 도움만 된다면 모든 수를 다 써봤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들 중 하나는“불가능”입니다. 너무 싫어하는 단어라서 사전에 있는 그 페이지를 찢고 다시 모아서 붙여 봤더니 단어가 “I’m possible”(난 가능하다)로 변했더군요. 삼십일년 동안 교수직을 맡았을 때 부터 지금까지도 학생들에게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캐나다와 미국의 제자들에게 저는 항상, “할 수 있다”라는 태도를 갖추라고 합니다. 교육은 제게는 해답을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리고 어떤 방법들이 있는가? 제 한인 학생들에게는 인생 모든 것에 도전해 보라고 격려합니다. 탐구와 노력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 있어서 저는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제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제가 넘어야 했던 두 번째 역경 이었습니다.
정체성과 차별 대우.
세 번째 시험은 정체성이었습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사람들은 저를 “Chinaman”(중국사람-경멸적인 용어)이라고 불렀습니다. 1955년 미국에는 아시아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자주 인종차별을 받았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꼈던 것은, “차별대우를 벗어나기 위해 한국을 떠났는데 여기서는 인종차별과 맞서게 됐군”이었습니다. 이 문제의 정점은 1958년, 제가 텍사스에서 미군에 징병됐을 때 일어났습니다. 매 주말 민간인 식당에 갔었는데 그 식당들은 “백인만 환영”이라고 써 있는 표시를 해놨었습니다.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지만 친구들이 괜찮다고 했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식당에 들어 갔는데, 화가 많이 난 주인이 다가와 의자에서 저를 일으키고는 문 밖으로 쫓아 냈습니다. 저는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져 지면서, “하느님, 계신다면 저는 왜 항상 차별을 당해야 되는지 좀 알려주세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정치인이 돼서 법률을 개척하고 바꾸자는 꿈을 갖게 됐습니다. 32년이나 걸렸지만 무엇이든 좋은 일은 쉽게 해낼 수 없는 법이지요. 결국 해냈고 가치가 있었습니다.

정치인이 되는 꿈.
그래서 정치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치인들은 법을 만들고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은 “Oriental”(동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습니다. 제가 처음 당선되자 바꿔놓은 단어입니다. “Oriental”을 “Asian”으로 바꾸자는 제시를 한 이유는, 제가 미국하원의원으로 당선됐을 적엔 제가 입법상의 과정들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상원의원 캠페인을 할 때 문 두들기며 제 선거구민들에게 제 소개를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화를 내며 저를 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 Oriental(동양인)들은 너무 많아, 썩 꺼져,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저는 정말 화가 났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침착하게 생각한 후 대답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 이곳이 고향입니다. 이 나라에서 45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미군에서 2년 복무했고요. 제 가족, 제 부인과 제 자식 모두 미국주민들 입니다. 제 피부색이 다르다 해도 전 미국인입니다. 41년동안 세금을 내왔으니 이 곳이 제 고향이지요.” 그렇게 진심으로 얘기해 드렸더니 그의 안색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화를 내시던 분이 그 후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친구, 자네를 돕겠네.” 그렇게 그는 제 동지가 되어 선거당일까지 저를 위해 매일 문을 두드려 줬습니다. 제가 당선된 후 그가 제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엔 ‘Oriental’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던데, 왜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법률을 바꿔보지 그래? 이제는 할 수 있잖아.” 저는, “그래 고마워, Ted”라고 대답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1999년에 처음 시도했을 때 제 동료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하며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에 저는 16세기 영어사전 한 권을 복사해서 모두에게 나눠 줬습니다. 그 사전에 “Orien”은 런던의 동쪽이라는 뜻이라고 적혀져 있었습니다. “Oriental”은 납작한 코, 생선 눈, 둥근 얼굴형, 검은 머리, 작은 키, 검으며 의심스럽고,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믿지 못 할 인종이라고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금하는 법률은 2001년에 전원 일치로 통과 됐습니다. 2003년에 미 의회가 수락하고 법률로 통과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인이라고 불립니다. 흥미로운 점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와 인도에서 “Oriental”이 뭐가 잘못됐냐고 전화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법률들을 복사해 보냈더니 “Oriental”이란 단어는 전 세계에서 금지되었습니다. “Oriental”은 미숙한 단어이며 식민정책 시대의 용어라서 이제 우리는 아시안이라고 불려지게 된 것 입니다.
인종의 도가니가 아닌 “태피스트리”
어느 날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누구인지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저는 마틴 루서 킹 3세입니다. 당신이 한 일을 감사합니다. 1월 15일 캔자스 시티 미주리 주에서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를 열게 될 것 입니다. 기조 연설자로 당신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저는 승낙했습니다. 마틴이 저를 공항에서 맞이해 줬습니다. 그는 “제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당신을 제일 먼저 감사했을 거에요. 그도 ‘Negro’(니그로-흑인)이나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셨었거든요.”라고 말했어요. 그것은 노예 용어이지요. 회의에 도착하니 300여명의 기독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참석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했어요. “미국에는 많은 은유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구, 애플파이, 시보레(Chevrolet), 아님 가장 흔히 ‘도가니’라고 말하지요. 그것은 무슨 의미 일까요? 우리는 모두 도가니 속에서 녹아 한 피부색이 되나요?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미국에 대한 은유는 ‘태피스트리’입니다. 흰 실, 검은 실, 갈색 실, 노란 실, 모든 가지각색의 실들이 있어요. 한 가닥은 약하지만 우리가 서로 함께 뭉치면 하나의 단단한 태피스트리가 됍니다. 제겐 그것이 미국입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의 태피스트리 은유가 도가니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같이 녹아서 한가지 색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색이 바뀌지 않습니다.
생존, 교육, 정체성이란 세 가지의 고비들을 넘겨야 했지만 오늘 제가 갖고 있는 것들, 해온 일들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저를 통해서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는 점 또한 저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때론 정체성 혼란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 것은 보편적인 일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유색인”으로 생각했고 그것이 신경 쓰였습니다. 이제 저는 제 자신이유색인이 아닌, 누구와도 다름없는 한 인간이란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한국계 미국 학생 회의에서 연설하셨을 때 미국에서도 언젠가 한국계 미국인 대통령이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신 상원의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1987년 미 대통령 Ronald Reagan과 캐나다 국무총리 Brian Mulroney가 미국-캐나다 국경에서 악수 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When Irish Eyes are Smiling”(한 아일랜드 민요)을 노래했었습니다. 두 분은 아일랜드에서 왔습니다. 그 곳은 긴 이민역사가 있었고,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미국과 캐나다로 왔고 이 두 국가의 지도자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21세기에 한국계 캐나다인이 국무총리가 되고 한국계 미국인이 대통령이 되어 미국-캐나다 국경에서 같이 서서 아리랑을 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것을 본 후로는30년 안에 한국계 미국인 대통령이 나올 거라고 주변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것이 보입니다. 누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노예와 차별대우, 그 모든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통령이 될 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어떤 방법으로 성공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미국인들이 그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은 제 자신과 저의 시각을 바꿔놨습니다.
1세와 2세 캐나다 한인과 미국 한인들의 차이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 상원의원: 전 1세와 2세들이 서로 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고 봅니다. 먼저 서로와 공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리고 그 것에서 배우며 미래를 위한 개척을 해야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1세, 2세들은 서로를 탓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탓하지 말고 보완해 주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2세들은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96년 저는 주한 미국대사 후보자가 됐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는 핵무기, 교육, 정치 같은 한국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 어느 한 남자가, “신 박사님, 주한 미국 대사가 되셔서 한국과 미국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어느 편을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대답을 할지 잘 몰랐지만 곧 전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질문 감사합니다. 제게는 미국은 조국입니다. 미국은 제게 집, 가정, 사랑과 교육을 줬습니다. 오늘 제 모습을 만들어 줬죠. 반면에 한국은 제 모국입니다. 제게 출생, 문화, 배경 그리고 인종을 줬습니다. 지금 제게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다투실 때 누구 편을 들 것인지 물어보시는 것입니까? 당신이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편을 드시겠습니까?” 전 계속 말했습니다. “제 선택을 말씀 드리지요. 저는 제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사이를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대사가 되면 미국 편을 들겠다고 대답 했었어야 했는데, 저는 제 모국과 조국에 기여를 동등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제가 한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전 제 모국을 조국보다 조금도 덜 사랑하지 않습니다. 둘 다 똑같이 사랑합니다. 전 이 나리로 입양 되어서 이렇게 성장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역경들은 제게 기회들이 됐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젊습니다. 활기찬 미래가 앞에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신 상원의원: 역사적으로 캐나다나 미국 한인 1세들은 한국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대화합니다. 반대로 2세들은 자신들이 캐나다나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정��성에 대한 혼란을 겪습니다. 미국에서는 많은 2세들이 그 문제들로 인해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1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변호사, 의사 등등이 되라고 합니다. 바른 길일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12년전 한인 2세 Westpoint 미군학교 학생이 6층 빌딩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날 경찰은 그가 죽기 전에 쓴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진심으로 군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라고 만 적혀있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는 Westpoint에 다녔을까요?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께선 한국 군대의 지휘관이셨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꿈은 장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장군이 되지 못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꿈을 떠 넘겼고 그로 인해 결국 아들은 목숨을 잃게 됐지요.
1세와 2세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같이 배우고, 서로를 이해하며 사이가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1세 한인들은 그래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민을 오면서 이 나라의 사람이 됩니다. 다같이 협력을 해야 합니다. 잠시의 과도기가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쉬워질 것입니다. 시간이 좀 필요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며 함께 의미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과거를 잊을 수는 없습니다. 정체성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여태까지 이루신 일들 중에선 가장 큰 업적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제 대답은 간단해요. “그다지 없습니다. 제가 이룬 건 작은 것들인걸요. 그러나 작은 일 하나 하나 정성과 사랑을 부었어요.” 아직 죽진 않았지만 죽는 날 전 무엇을 제 묘에 적어둘지 압니다. “두 문화에서 자신을 깨닫고 세상을 발견한 자.” 젊은 세대도 이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꾸어라, 희망을 가져라.
많은 아이들이 “제 어머니께서 대학가길 원하셔서 가고 싶어요”라고 하는데 이건 아주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전 여기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이어야 합니다. 이런 자세가 교육을 더 보람지게 만듭니다.
전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꿈을 따르라고 권합니다. 미대륙에서 자신이 하고픈 건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캐나다가 앞서가고 있습니다. 캐나다가 대학생 비율이 미국보다 더 크단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들에게는 미래가 있으며 이 넓은 땅은 당신들의 것입니다.
의원님께선 꿈이 있으십니까? 무엇을 성취하시고 싶으세요?
신 상원의원: 이 곳에서 살게 된 건 큰 축복입니다. 제 임기가 내년에 끝나면 은퇴하려고 계획했었습니다. 한 임기 더 일하는 대신 여행을 하면서 입양아들과 고아들을 돕고 싶었지요. 그들만의 어려움들이 있어서 돕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몇 년 전 16살인 청년이 제게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원망을 사랑으로 어떻게 승화 시키셨나요?” 저는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의원님께서는 아버지를 원망 하셨잖아요. 근데 이젠 사랑하시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하셨었을 수 있었죠?” 그가 무슨 일 때문에 제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인지 몰라서 그의 어머니께 여쭈어 봤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그들을 버리고 떠나서 어머니가 살림을 유지하기 위해 두 개의 일을 더 맡으셨었답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선 아들과 함께 저를 캘리포니아로 찾아오셨습니다.절 버렸던 제 친아버지를 찾고 다른 형제들과 그 분을 미국으로 모셔온 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그 청년은 계속 “아버지가 싫어요! 아빠가 싫다고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제 할아버지가 되어 주세요.” 전 “네 할아버지 되는 게 기쁘구나”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젠 그 청년은 거의 매 주 전화해서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전 제 아버지를 찾아서 사랑할 거에요!”라고 말한답니다. 이 후로 저는 상원에서 한 임기를 더 일하며 그 청년 같은 아이들을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내년에 제 캠페인이 시작됩니다. 상원의원 일이 끝나면 여든 살이 되겠네요. 많은 나이지만 입양아들을 위해 끝없이 일할 것입니다. 그렇게 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신호범 상원의원 프로필.
신호범 상원의원께서는 1935년에 태어나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보병에게 입양되셨습니다. 입양 가족의 고향인 미국에서 검정고시(General Educational Development) 공부를 시작했으며 워싱턴 대학 역사학 박사가 되셨습니다. 31년간 대학교수로서, 26년간은 시애틀의 Shoereline 지역대학에서 교무하신 후 은퇴하셨습니다. 현재 폴 신 상원의원께선 국제 관계 소위원회의 의장과 경제개발, 무역, 혁신 위원회의 부의장으로 근무하십니다. 신 상원이원께서는 또한 고등교육 및 인력개발 위원회와 농업 및 지방개발 위원회에서도 근무하십니다. 워싱턴주를 대표하셔서 국제 무역 촉진을 위한 끝없는 노력을 하고 계십니다. 워싱턴주의 교육과 취업기회 향상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신 상원의원님과 부인 Donna께서는 Edminds에서 30년이상 거주하셨습니다. 두 분은 두 자녀와 다섯 손자들이 있습니다.
인터뷰 날짜: 2009년 12월 6일.
인터뷰진행: 이주석, 신용섭, 김요셉, 윤선아
사진촬영: Gerald Law.
인터뷰들에 표현된 의견은 JoinTheLeaders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번역: 스텔라 가은 김.
편집: 이아형